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직관적으로 자연현상을 터득합니다.
직관이란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식탁 위의 컵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양초가 타면 사라져버립니다.
해는 뜨고 지며, 땅은 수평선 끝까지 평평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상은 우리의 직관과 다른 법칙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컵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 질량과 거리의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였으며,
양초는 고체에서 기체로 분자의 형태만 바뀐 것이지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해 대신 우리가 움직이고 있었고, 땅은 너무나도 둥글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을 배우면서 직관과 맞서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직관적 이미지를 무시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로 우리의 직관은 지식으로 대체됩니다.
그런데 유독 대체되기 어려운 직관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화에 관한 직관입니다.
다른 자연현상과 달리 진화를 떠올리려면 거대한 시간 개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겨우 수십 년을 경험한 우리가 수십만 년에서 수십억 년에 달하는 지질학적 시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덕분에 진화에 대해선 뿌리 깊은 오해가 남아있습니다.
진화의 메커니즘을 잘못 알고 있거나,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거나,
아예 진화 대신 신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이런 오해의 배경에는 종교나 사회적 요인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진화에는 반직관적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 오늘은 우리의 직관이 만들어낸 오해들이 어떤 것인지, 직관적 오해와 과학적 설명의 차이는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진화탐구영역이 있다 치고 문제를 한번 풀어볼까요?
평균적으로 3cm의 부리를 가진 딱따구리들이 어느 외딴섬에 고립되었습니다.
외딴섬에 있는 유일한 먹이는 나무속 곤충들입니다.
그런데 이 섬의 나무껍질은 두께가 죄다 4cm입니다.
딱따구리들의 부리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겁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딱따구리들이 짝짓기를 하면 그들의 자손들은 어떤 부리를 갖게 될까요?
1 부모가 갖고 있는 것보다 긴 부리
2 부모가 갖고 있는 것보다 짧은 부리
3 긴 부리, 짧은 부리 반반의 가능성
정답은 3번입니다.
자손들은 부모로부터 무작위하게 변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1번도 살짝 고민이 됩니다.
”딱따구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 긴 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긴 부리를 갖고 태어날 것이다”,
혹은 “긴 부리가 딱따구리 종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다”와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진화가 어떤 필요에 의해 진행될 거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화에는 어떤 필요, 즉 목적성이 없습니다.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부모가 자식을 낳는 행위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복제행위입니다.
최선의 복제행위는 100% 똑같은 카피를 만드는 것이겠지만 세상의 모든 유전자 복제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로 실수와 오류를 범하며, 이런 완벽하지 않은 복제가 바로 유전적 돌연변이입니다.
우리가 부모와 닮기 해도 완전히 똑같지 않은 이유가 바로 유전적 돌연변이 때문이죠.
유전자 입장에서는 긴 부리가 생존에 유리할지 짧은 부리가 생존에 유리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변이를 통해 얻게 된 형질이 마침 생존에 유리하면 그 형질을 가진 놈들이 더 많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더 빨리 사라질 뿐입니다.
진화탐구영역 문제를 하나 더 풀어볼까요? 이번에는 색칠하기 문제입니다.
영국의 토종나방인 후추나방은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진화한 사례로 유명합니다.
도시에 그을음이 가득하자 천적의 눈에 덜 띄는 검은색으로 진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추나방의 진화 과정은 어떠했을까요?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진화가 100년에 걸쳐 일어났다 보고 25년마다 색 변화를 칠해보는 게 문제입니다.
네 언뜻 생각하면 나방들이 점점 어두워지게 변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검은 나방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생존에 유리한 검은색 돌연변이가 개체군 안에서 더 많이 살아남게 되고,
살아남은 돌연변이는 더 많은 자손을 낳게 되고,
결국엔 개체군 전체의 색깔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설명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입니다.
네 두 문제는 진화에 대한 오해와 다윈 진화론의 핵심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알아보는 문제였습니다.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진화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설명하는 과학적 매커니즘이며,
인류의 오랜 직관을 바꿔 놓은 혁신적 사고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혁신적 사고는 우리의 직관과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진화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다윈 시대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중 유명한 것은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입니다.
용불용설이란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학설입니다.
예를 들어 기린은 높은 나무에 있는 잎을 먹기 위해 목을 끊임없이 늘리다 보니 긴 목을 갖게 되었다.
독수리는 멀리 있는 먹이에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시력이 발달하게 되었다.
후천적으로 얻어진 이런 변화들은 자손들에게 전달되고, 다음 세대는 다시 조금 더 긴 목과 조금 더 나은 시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설명이 바로 용불용설입니다.
하지만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은 유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용불용설은 핵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용불용설이 범하는 또 다른 오류는 ‘개체군들이 집단적으로 진화한다’라고 가정한 것입니다.
모든 기린은 더 긴 목을, 모든 독수리는 더 나은 시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며
그 결과로 다음 세대는 모두 더 긴 목과 더 나은 시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후추나방 문제에서 보았듯이 모든 개체들이 적응에 유리하게 태어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떤 개체들은 적응에 유리하게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자손 없이 죽게 되어 유전자 풀에서 제거될 뿐입니다.
결국 다윈이 깨닫고 라마르크가 깨닫지 못한 것은,
진화는 집단적으로 변화하는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복합적인 과정으로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뒤로 용불용설은 거의 폐기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용불용설식 설명을 떠올립니다.
용불용설이 그만큼 쉽고 직관적이기 때문이겠죠.
자연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직관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탓할 수 없겠지만,
과학적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직관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사실 용불용설은 생명체들이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변화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같은 생명체인 우리를 끌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불길한 암시.
우리는 무작위적인 변이와 우연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
우리가 덜 고귀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우리가 무작위와 우연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결코 우리를 덜 고귀한 존재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우리의 존재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이끌어냅니다.
모든 생명은 무수한 세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기린의 긴 목은 거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목이 짧아 잎을 충분히 먹지 못한 기린들의 희생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형질들도 수많은 희생과 멸종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삼신할머니의 점지나 신의 은총과 같은 외부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시간 속에서 무수한 희생을 바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더 경이롭고 소중한 게 아닐까요?
딱따구리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짧은 부리로 태어나지 않길 바랄 겁니다.
후추나방의 부모들도 자식들이 하얀 색으로 태어나지 않길 바랄 겁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이 모자라거나 엉뚱하게 태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연변이를 오류 또는 결점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모든 진화생물학자는 돌연변이야 말로 생명활동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유전자가 100% 완벽한 복제행위를 유지했다면 지구상에 생명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겁니다.
완벽한 복제만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돌연변이를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이는 오류나 결점이 아닙니다.
변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다른 점, 부모의 바람과 다르게 태어난 점,
모자라거나 엉뚱한 점들이 바로 그 종의 생존을 보장하는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직관 대신 과학을 선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건 지식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북툰이었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