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AI 시장에서 '조기 발견'은 가장 유망한 분야지만, 수가를 받기 위해 치료 결과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입증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시장은 기술의 구조화 수준과 타깃 질병의 실체 유무에 따라 4가지 영역으로 나뉘며, 각 영역에 따라 가치 입증 난이도와 전략이 달라집니다. 스타트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적 혁신을 넘어, 의료 제도가 요구하는 언어로 가치를 증명하거나 B2C 웰니스 시장으로 방향을 잡는 등 유연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1.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법: 조기 발견 시장의 딜레마와 분류 기준
현재 의료 AI 시장에서 조기 발견(Early Detection)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증상이 생기기 전에 병을 찾아낸다면 환자의 생존율도 높이고 국가 의료비도 아낄 수 있으니, 이론상으로는 모두에게 이득인 셈이죠. 하지만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스타트업이 자칫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죽음의 계곡'과도 같습니다.
의료 시장에서 돈(수가)을 벌기 위해서는 이 기술이 치료 결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진단이나 치료, 어떤 형태의 솔루션이든 의료 수가를 받기 위해서는 치료 결과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입증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조기 발견이 '치료'나 '완치'라는 최종 결과와 시기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에요. 진료 흐름상 맨 앞에 위치하다 보니, 이 검사 덕분에 환자가 나았다는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이 난관을 뚫고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장을 명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카카오벤처스는 조기 발견 시장을 다음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습니다.
- 구조화 수준: 기술이 병원의 표준 진료 지침과 의사의 워크플로우 안에 얼마나 잘 녹아들었는가?
- 질병의 실체: 검사 결과가 '질병 있음/없음'으로 명확한가, 아니면 '발병 위험도 15%' 같은 확률인가?
이 기준을 적용하면 조기 발견 시장은 아래와 같이 4개의 사분면으로 나뉩니다.
2. 제1사분면 [선별검사]: 이미 닦인 길 위에 AI 얹기
선별검사(Screening)는 위·대장 내시경이나 유방 촬영술처럼 특정 질병을 찾아내기 위해 주기적으로 시행하는 검사를 말합니다. 이 영역은 확인하려는 질병의 실체가 명확하고, 병원의 진료 시스템(구조) 안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4개의 영역 중 의료 수가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입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Digital Diagnostics의 'LumineticsCore'를 들 수 있습니다. 이 AI는 당뇨병성 망막병증을 진단하는데, FDA로부터 자율형 의료 AI로 허가를 받았습니다.
성공 비결은 명확했습니다. 기존에는 안과 전문의만 할 수 있던 검사를 1차 의료기관에서도 할 수 있게 만들어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한다는 가치를 확실하게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미 가치가 입증된 선별검사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비교적 수월합니다. 하지만 다중 암 조기 발견(MCED)처럼 완전히 새로운 검사를 도입하려는 경우에는 "이 AI 덕분에 전체 의료비가 줄어든다"거나 "생존율이 급격히 오른다"는 것을 처음부터 증명해야 하기에 훨씬 더 큰 비용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3. 제2사분면 [위험도 예측]: 단순한 경고를 넘어 행동을 이끌어내라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당신은 현재 암은 아니지만, 5년 내 발병 확률이 높습니다"라는 결과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험도 예측 영역입니다.
문제는 보험사나 의료계가 단순히 '위험하다'는 계산 결과만으로는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처방이나 행동 지침이 없다면, 위험도 점수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보험사에서는 이미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 위험도만 계산해 주는 것에, 의사의 진료 과정에 포함되는 상담 이상의 의료적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굳이 추가적인 수가를 내어줄 이유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의료계의 표준 진료 지침(구조)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iCAD나 루닛(Lunit) 같은 기업들이 좋은 예시입니다. 이들의 AI는 유방 촬영 이미지를 분석해 당장 암이 없더라도 미래의 위험도를 점수화합니다. 중요한 건, 이 점수가 의사로 하여금 "위험도가 높으니 MRI를 추가로 찍어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의학적 근거가 된다는 점입니다.
즉, 2사분면의 핵심은 확률 계산을 넘어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Action Plan)"를 명확히 제시하여 진료 가이드라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4. 제3사분면 [선제적 모니터링] & 제4사분면 [기회 검진]
제3사분면: 선제적 모니터링 (의료와 웰니스 사이)
이곳은 병원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애플워치 같은 웨어러블 기기로 심박수나 혈당을 체크하는 경우가 해당하죠. 냉정하게 말해, 의료 현장에서 이 영역에 대한 관심은 가장 낮습니다.
의사들은 당장 아픈 환자를 보기도 바쁜데, 건강한 20대가 운동하다 측정한 데이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기기 오류로 인해 불필요하게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어나면 오히려 의료 자원 낭비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역은 억지로 의료 수가를 받으려 하기보다, 소비자가 직접 지갑을 여는 매력적인 웰니스(Wellness) 서비스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일 수 있습니다.
제4사분면: 기회 검진 (우연을 필연으로)
폐암 검사를 위해 CT를 찍었는데 우연히 골다공증을 발견하는 경우처럼, 의도치 않게 다른 병을 찾아내는 것을 기회 검진이라고 합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버려지던 영상 데이터를 전수 분석해 이런 '우연한 발견'을 늘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보험사는 불필요한 비용 증가를 우려하고, 병원은 발견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과로 환자를 보내는 과정(전원)이 복잡해지는 딜레마를 겪습니다.
이 영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 가치 입증 완료: 골다공증처럼 조기 발견의 효과가 이미 증명된 질병이어야 합니다.
- 즉각적 개입 가능: 발견 즉시 약물이나 수술 등 명확한 치료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5. 마치며: 혁신을 제도의 언어로 번역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조기 발견 시장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은 제1사분면(선별검사)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영역의 스타트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26년 현재, 크게 두 가지 생존 전략이 제시됩니다.
- 제도권 진입 (1사분면으로 이동): 비용이 들더라도 임상시험을 통해 의학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우리 기술을 병원의 표준 절차(Screening)로 편입시키는 정공법입니다.
- 시장성 확보 (B2C 공략): 의료 수가라는 좁은 문을 고집하지 않고, 제3사분면의 특성을 살려 소비자에게 직접 사랑받는 웰니스 서비스로 발전시키는 방법입니다.
결국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만으로는 의료 시장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창업가에게는 자신의 혁신 기술을 의료 제도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로 바꾸어 설득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의료 시장에서 기술 혁신을 기반으로 수가 승인을 막연하게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기술의 혁신성을 제도가 요구하는 언어로 번역해 전달하는 능력, 이것이 지금 디지털 헬스케어 창업자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