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세이는 실리콘 밸리의 거물들이 공상과학 소설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비즈니스 모델과 정치적 의제를 정당화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합니다. 엘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피터 틸, 마크 안드레센 등이 자신이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작품들의 핵심적인 메시지나 경고를 무시하고, 기술적 미학이나 특정 아이디어만을 차용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반민주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현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이 글은 이러한 '반동적 미래주의'가 어떻게 기술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사회적 퇴행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지 경고하며, 다양한 미래를 상상하고 함께 만들어나갈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1. 공상과학을 재해석하는 실리콘 밸리 거물들
2026년 1월, 스페이스X 스타베이스에서 엘론 머스크는 미 국방부 관계자들 앞에서 스타트렉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는 대형 우주선을 타고 외계 문명을 탐험하며 인류가 별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미래를 그렸죠.
"우리는 스타트렉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요, 알겠죠? 스타플릿 아카데미를 현실로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항상 공상과학에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공상과학이 과학적 사실이 되어 우주를 가로지르는 우주선들을 갖게 되는 거죠. 커다란 우주선들 말이에요!"
하지만 스타트렉은 돈이 사라지고 인류가 공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탈희소성, 탈자본주의 사회를 묘사합니다. 이는 이익이나 군사적 지배가 아닌 지식 탐구를 위한 평등을 원칙으로 하죠. 머스크는 스타트렉의 웅장한 우주선이나 외계 조우 같은 미학적 요소만 가져오고, 그 정치적, 사회적 기반은 무시한 셈입니다. 마치 스타트렉 세계에서 자본주의, 민족주의, 군사주의는 이미 과거의 유물로 남겨졌는데도 말이죠. 머스크는 엔터프라이즈호를 원하지만, 군산복합체에 맞춰 재해석된 버전을 꿈꾸는 것입니다.
2. 경고를 무시한 재해석: 메타버스, 사이버트럭, 그리고 재단
2021년,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메타'로 리브랜딩하면서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우 크래시 (1992)에서 '메타버스'라는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 소설은 아바타가 디지털 공간을 탐험하는 가상현실 세계를 상상하죠.
하지만 스노우 크래시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날카로운 풍자 소설 중 하나입니다. 스티븐슨은 이 소설을 경고의 메시지로 썼어요. 그의 메타버스는 사회가 붕괴된 후 얻는 위안 같은 것이었죠. 연방정부는 해체되고, 기업 프랜차이즈가 일상생활을 지배하며, 심지어 피자 배달마저 마피아가 운영하는 사기업으로 변했습니다. 주인공은 피자 배달원이자 해커인데, 가상세계의 아바타만이 그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스티븐슨은 디지털의 화려함과 물질적 빈곤의 대비를 섬뜩하게 의도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플랫폼 자본주의가 나아갈 수 있는 경고의 비전으로 본 것이죠. 저커버그는 이러한 경고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소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2017년에 "우리는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정신을 대변했습니다.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어떤 환상의 부분을 선택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019년, 머스크가 테슬라의 사이버트럭을 공개했을 때, 그는 이미 투자자들에게 "정말 미래적이고, 사이버펑크 블레이드 러너 같은" 것을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머스크는 붕괴하는 세상을 위한 생존 장비를 팔고 있었고,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버전을 현실화하려 했습니다. 미학은 현실이 되었지만, 소설의 경고는 무시된 것입니다.

머스크는 자신이 어릴 적 읽었던 공상과학 소설이 "더 깨끗한 에너지 기술을 개발하거나 인간 종의 활동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우주선"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스페이스X에서의 자신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죠. 아시모프의 소설은 은하 제국의 몰락을 예견하고 다가올 암흑기를 대비해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는 수학자 해리 셀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소설들은 진정으로 비범한 민주적 상상력의 작품들입니다. 아시모프의 핵심 통찰은 문명의 생존이 고독한 천재가 아닌 집단적 제도, 분산된 지식, 그리고 민주적 숙의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셀던의 가장 중요한 행동은 예언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협력하는 학자들의 숨겨진 네트워크인 제2 재단을 설립한 것입니다. 소설의 도덕적 구조는 명백히 반권위주의적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이 임무를 장악하려 할 때마다 이야기는 그것을 재앙으로 묘사합니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의 필수 불가결성에 대한 지속적인 주장인 셈입니다.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그토록 깊은 공감을 얻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제도에 대한 정서적 관용 때문입니다. 셀던의 '심리 역사학'은 한 사람의 천재성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공동체를 위해 작고 종종 익명적인 선택을 하는 수백만 명의 행동을 모델링하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죠. 후기 소설의 영웅들은 선구자가 아니라 사서, 외교관, 그리고 시민 행정가들입니다. 아시모프가 그린 먼 미래의 비전은 문명의 평범한 인프라, 즉 기록 보관소, 위원회, 협상된 합의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머스크의 해석은 이 모든 것을 버립니다. 2024년까지 그는 "다행성 존재가 되는 것이 인류와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의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데 중요하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스페이스X의 사업을 문명적 필수 과제로 포장하고 비판으로부터 면역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이는 머스크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고독한 선구자, 셀던의 역할에 놓으려는 것이죠. 그 결과 노동 관행, 환경 비용, 혹은 화성 식민지화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은 인류 생존을 방해하는 단순한 마찰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과학적, 도덕적 근거에서 모두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천체 물리학자 아르웬 이 니콜슨과 라파엘르 디 헤이우드는 화성 테라포밍의 최상의 시나리오조차 인간이 숨 쉴 수 없는 고농도 CO₂ 대기를 남기며, 지구 생물권과 생명체 간의 수십억 년에 걸친 공진화를 인간 생존에 필요한 시간 내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머스크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장기적인 정당성으로 태양의 궁극적인 팽창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니콜슨과 헤이우드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수십억 년 후의 문제이며, 향후 50년 내에 기후 위기가 전개되는 동안 이를 긴급하게 다루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윤리적으로는 앤드루 러셀과 리 빈젤은 머스크가 말하는 '인류'가 놀라운 속임수를 숨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목표로 하는 100만 명의 화성 식민지 개척자들은 현재 지구 거주자의 0.014%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이죠. 우주 투자가 모두에게 혜택을 준다는 '낙수 효과'는 낙수 과학입니다.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라면, 화성으로 가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흘러넘치기를 바라는 것보다 그 문제들을 직접 겨냥하는 연구 의제가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시인 길 스콧-헤론이 1970년에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누이들이 쥐에게 물어뜯기는 동안 "백인들이 달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러셀과 빈젤이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화성에 백인을 보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머스크는 해리 셀던이 되고 싶어 하지만, 셀던이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고 알았던 재단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3. 이상주의를 벗겨낸 기술 비전: 우주 식민지와 자유지상주의
제프 베이조스 역시 제라드 K. 오닐의 책 높은 경계 (1976)에서 영감을 받은 우주 서식지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합니다. 오닐의 비전은 20세기 사변적 사상 중 가장 야심 차고 인본주의적인 것 중 하나였습니다. 거대한 회전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여 산업을 지구 밖으로 옮겨 지구의 환경 압력을 완화하고, 정착지는 민주적으로 통치되며 혜택은 광범위하게 분배될 것이라고 상상했죠. 오닐은 이 식민지들이 인류의 다음 위대한 집단 프로젝트이자 우주로의 진정한 민주적 확장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베이조스의 해석은 모든 해석과 마찬가지로 선택적입니다. 그는 공학적 비전과 야망의 규모만 가져가고, 오닐의 프로젝트에 도덕적 기반을 제공했던 민주적 거버넌스와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혜택은 버려버렸습니다. 그의 비전은 무한한 성장, 무한한 자원만을 꿈꿉니다. 그러나 머스크의 화성 야망처럼, 베이조스의 우주 식민지는 지구의 환경 위기를 집단적 행동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 확장으로 해결될 자원 제약으로 재구성합니다. 공상과학 비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구가 되며, 사적 자산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사적 이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죠. 오닐은 이 식민지들을 인류의 민주적 미래로 상상했지만, 베이조스는 그것들을 아마존의 다음 개척지로 제시합니다.
PayPal과 Palantir의 공동 창립자인 피터 틸은 공상과학을 정치적 청사진으로 언급했습니다. 그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소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1966)을 참고합니다. 이 소설은 달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켜 최소한의 정부를 가진 자유지상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내용입니다. 2025년 로스 도우셋과의 뉴욕 타임즈 팟캐스트에서 틸은 자신의 트랜스휴머니스트 견해를 논했습니다. 인류가 현재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잠시 망설인 후 "네"라고 답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적 독해는 반정부 미학을 취하고 착취의 경제적 기반을 버린다."
하지만 하인라인의 소설은 틸의 해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자유지상주의 전단지가 아니라, 혁명이 실제로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에 대한 진정으로 복잡한 정치 소설입니다. 하인라인의 달 식민지 개척자들은 기업가가 아니라 죄수, 추방자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공유된 궁핍 속에서 취약한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인간 반군과의 우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인공지능 '마이크'입니다. 그는 효율성이나 이익이 아니라 호기심과 소속감을 통해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하인라인이 상상한 혁명은 혼란스럽고, 타협적이며, 피로 가득합니다. 책은 승리로 끝나지 않고,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에 대한 지친 양가감정으로 끝납니다. 하인라인은 개인의 자유와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유대 사이의 긴장에 진정으로 매료되었습니다. 틸은 이 모든 것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하인라인의 달은 죄수 식민지였으며, 자유지상주의 사회는 이송된 죄수들의 노동을 기반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선택적 해석은 정확합니다. 반정부 미학을 취하고 강압과 착취라는 경제적 기반은 버리는 것이죠. 하인라인의 달은 관료적 간섭 없이 강인한 개인주의자들이 번성하는 개척 유토피아입니다. 실리콘 밸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주권을 가진 부유 도시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스테이딩 운동은 소설의 환상을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틸은 50만 달러를 투자하여 이를 시작했으며, 2009년 한 컨퍼런스에서 시스테이딩은 가능성이나 바람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성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틸은 카토 연구소에 기고한 2009년 에세이 '자유지상주의자의 교육'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더 이상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1920년 이후, 복지 수혜자들의 엄청난 증가와 여성에게의 참정권 확대 —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는 특히 힘든 두 집단 — 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모순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크 안드레센의 '기술 낙관주의자 선언' (2023) 역시 공상과학의 영향을 언급하며, 정부 규제로 인해 좌절된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풍부한 에너지의 잃어버린 미래를 한탄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가속주의를 믿습니다 —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기술 개발의 추진… 우리는 AI의 어떠한 감속도 생명을 앗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존재를 막은 AI로 인해 예방 가능했던 죽음은 일종의 살인입니다."
이 선언문은 속도 그 자체를 도덕적 절대치로 취급합니다. 어떠한 지연, 규제, 예방도 죽음의 공범으로 재구성되는 것이죠. 1950년대의 공상과학 소설은 날아다니는 자동차, 풍부한 에너지 등을 상상했지만, 그것은 스리마일 섬 사고, 체르노빌 사고 이전에, 속도를 안전보다 우선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재앙을 통해 배우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안드레센이 해체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규제 체계는 어렵게 얻은 교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낙관적인 미학은 차용되었지만, 교훈은 버려진 것입니다.
4. 권력의 도구로 변질된 '보는 돌'과 '사이버스페이스'
어쩌면 가장 명확하게 이러한 경향이 드러나는 곳은 Palantir Technologies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1937-49)은 20세기 문학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바로 권력의 부패하는 본질에 대한 확장된 명상이기 때문이죠. 산업 전쟁과 제국주의적 착취의 그림자 속에서 쓰인 이 작품은 산업적 힘의 전체주의적 야망에 맞서 작고, 지역적이고, 화려하지 않은 것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핵심적인 도덕적 교훈은 올바른 영웅이 올바른 무기를 휘두르면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부패하며, 반지는 누구도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없고, 유일한 구원은 지배하려는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톨킨의 허구적인 호빗 종족은 강력해서가 아니라 권력의 논리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톨킨은 이 주장을 하기 위해 전체 신화를 구축했습니다.
톨킨의 소설에서 '팔란티리'는 사용자가 먼 거리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보는 돌' 또는 수정구입니다. 중립적인 도구, 즉 감시 기술처럼 들리지만, 그것들은 부패의 장치입니다. 사루만의 팔란티르는 그를 사우론과 연결시켜 그의 몰락을 가져오고, 데네소르의 팔란티르는 그를 광기와 자살로 몰아넣습니다. 팔란티리는 단순히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스터하는 자들에 의한 조작과 통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디스토피아는 피할 수 없었고, 충분히 편안해져서 기꺼이 동참하게 되었다."
미국 회사 Palantir Technologies는 정부, 군대, 그리고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에 분석 및 감시 도구를 제공합니다. 그 이름은 정치적인 역할을 합니다. 침해적인 추적을 신비로운 통찰로, 알고리즘 감시를 체계적인 침입이 아닌 현명한 통찰로 변모시키는 것이죠. Palantir의 CEO 알렉산더 카프와 법률 고문 니콜라스 자미스카는 2025년 저서 기술 공화국에서 Palantir의 정부 업무를 전투적인 용어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연합과 전사 집단을 건설할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속에 대한 인간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감시 도구가 전사 형제애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고 주장합니다. 톨킨의 이름은 미학적 권위를 제공하지만, 톨킨의 실제 도덕적 비전과의 거리감은 그것 없이 행동할 자유를 제공합니다. 사용자를 부패시키고 배신하는 장치들의 이름을 따서 감시 회사를 명명하는 것은 오마주가 아니라, 도덕적 핵심을 거부하면서 미학을 전용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 (1984)는 깁슨이 만들어낸 용어인 '사이버스페이스'를 소개했습니다. 주인공 케이스는 전 고용주로부터 처벌로 신경계가 손상된 해커입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추방당한 그는 네온 불빛이 가득한 치바 시를 떠도는 '콘솔 카우보이'가 됩니다. 소설 속 사이버스페이스는 거대 기업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며, 개별 해커는 영웅이 아니라 그들이 거의 볼 수 없는 이익에 의해 고용되고 버려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깁슨의 비전은 명백히 디스토피아적이었습니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민주화 잠재력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본에 의해 포획되어 그 자체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 세상이죠.

1988년 9월, 소프트웨어 개발자 존 워커는 오토데스크 내부 백서 '거울을 통해: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넘어'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사이버펑크 이니셔티브'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했는데, 12개월 이내에 사이버스페이스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젝트의 모토는 단호했습니다. "현실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2025년, OpenAI의 샌프란시스코 본사 접수 구역에서는 신나는 전자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편안한 의자, 쿠션, 그리고 스위스 치즈 식물들이 CEO 샘 알트만이 "기업형 공상과학 성"이 아닌 "편안한 전원주택"이라고 부르는 공간을 만듭니다. 사이버펑크의 크롬과 오물, 즉 디지털 공간의 기업 포획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일 것이라는 네온 불빛의 경고는 스칸디나비아 가구와 수제 커피로 대체되었습니다. 깁슨의 '합의된 환각'은 아늑한 가정 분위기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디스토피아는 피할 수 없었고, 충분히 편안해져서 기꺼이 동참하게 된 것이죠.
깁슨 자신도 이러한 아이러니를 인식했습니다. 2012년 와이어드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뉴로맨서의 사이버스페이스 — 온통 기업 이익과 정보 도둑들로 가득 찬 — 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초기 인터넷과는 거의 닮지 않았다고 인정했습니다. 1990년대-2000년대는 방에 있는 십대조차 기업과 경쟁할 수 있었고, 네트워크가 잠시나마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라고 느껴졌던 시기였죠. 깁슨은 그 단계를 완전히 놓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상황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우연히도 옳았습니다. 현재 디지털 생활을 지배하는 기업 플랫폼 — 구글, 메타, 아마존 — 은 그들 사이에 잠시 번성했던 참여형 웹보다는 그의 원래 비전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깁슨은 사이버스페이스를 처음부터 기업 지배의 공간으로 상상했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먼저 개방형 인터넷을 구축했지만, 결국 그의 디스토피아로 수렴하고 말았습니다. 차이점은 뉴로맨서에서는 그 수렴이 저항해야 할 재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의 경고를 제품 로드맵으로 바꾼 것이죠.
5. 캘리포니아 이데올로지에서 텍사스 이데올로지로
이러한 세계관은 공상과학을 통해 표현됩니다.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축적 전략이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불가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매개체로서 말이죠. 이것은 공상과학이 이러한 프로젝트에 선행하거나 원인을 제공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한 야망이 생각 가능해지고 특정한 권력 장악이 상식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인지적, 제도적 틀의 일부인 것입니다.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무게 중심은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에서 '텍사스 이데올로지'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반문화적 자유지상주의와 디지털 유토피아주의의 융합이었던 캘리포니아 이데올로지와 달리, 텍사스 이데올로기는 자원 착취와 천년 왕국 기독교의 100년 된 융합, 즉 섭리적 운명이 자연 정복과 그 부의 추출을 정당화한다는 신념입니다. 이전 시대가 네트워크와 플랫폼 구축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로운 모델은 데이터를 석유 붐의 전리품처럼 취급하며, 거대한 서버 팜에서 채굴되어 엄청난 토지와 전력을 요구하는 천연자원으로 봅니다.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테슬라의 기가팩토리는 구글처럼 '캠퍼스'가 아니라 "소 목장만큼 큰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입니다. 이는 "기술의 힘을 길들이고 땅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의지"를 가진 남자들에 의해 건설될 미래를 상징합니다. 2024년 12월, 머스크는 스페이스X 본사를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옮긴다고 발표했습니다. 스페이스X의 사우스 텍사스 시설인 스타베이스는 이러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스페이스X가 규칙을 정하고, 직원들이 회사 주택에 살며, 지역 거버넌스가 기업 우선순위에 굴복하는 사유 도시인 셈이죠. 이것이 선택적인 공상과학이 정치적 현실로 작동하는 경로, 즉 사회적 퇴행을 위한 기술 진보의 위장입니다.
6. 장기주의와 AI 위험: 책임 회피의 구실
이러한 길은 '장기주의'라는 철학적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샘 뱅크먼-프리드(현재 암호화폐 사기로 수감 중)와 같은 기술 부자들이 자금을 많이 지원하는 효율적 이타주의(EA) 운동의 한 갈래입니다. 윌리엄 매카스킬과 같은 EA 지지자들은 엄격한 공리주의적 계산을 적용하여, 우리가 우주를 식민지화하면 존재할 수 있는 수조 명의 잠재적 미래 인류의 복지가 오늘날 살아있는 80억 인류의 필요를 수학적으로 압도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이것은 다음 천년 안에 발생할 수 있는 가상의 'AI 멸종'을 예방하는 것이 불평등이나 기후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며, 기술 리더들이 수십억 달러를 'AI 정렬' 연구에 사용하면서도 이미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알고리즘 시스템에 대한 규제는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계 학습 연구원 팀닛 게브루는 2023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러한 실존적 AI 위험에 대한 초점이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 아닌 도구에 주체성을 부여한다"며, 기술 기업들이 "책임을 회피"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문제는 AI 자체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 특정 특성을 가진 무언가를 만드는 기업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게브루가 AI 시스템이 "지배적인 관점을 영속시키고, 권력 불균형을 증가시키며,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논문을 공동 집필했을 때, 그녀는 구글이 자신을 해고했다고 말했습니다. 회사는 그녀에게 논문을 철회하거나 이름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게브루는 "다르게 행동하라는 외부 압력이 없다면, 기업들은 스스로 규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규제가 필요하고, 단순한 이윤 동기보다 더 나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상상 속 공상과학 시나리오가 인간 연대보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로봇 반란을 막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쓸 수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왜 고쳐야 할까요? 살인 로봇, 통제 불능 AI, 실존적 위험과 같은 멀고 재앙적인 시나리오로 정책 논의를 유도함으로써, 이 산업은 이미 피해를 야기하는 시스템 — 고용의 알고리즘 편향, 안면 인식의 인종 차별, 플랫폼의 극단주의 증폭 — 에 대한 규제로부터 주의를 돌립니다. 알트만은 AI 구축을 "1945년 맨해튼 프로젝트 원자폭탄 실험을 지켜보는 과학자들" 같다고 묘사하며, "미친 공상과학 기술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비유는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엘리에저 유드코프스키의 해리포터와 합리성의 방법 (2010)은 해리포터를 마법에 과학적 사고를 적용하는 합리주의자로 재해석한 방대한 팬픽션으로, AI 안전 커뮤니티의 기초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마추어 사변 소설조차 실리콘 밸리의 미래 비전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보여줍니다. 실제 사회 과학이나 정책 전문성보다 기술 리더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서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죠.
7. 반동적 미래주의: 독점적인 환상
이러한 공상과학 지향성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공상과학 팬, 트랜스휴머니스트, 사이퍼펑크들이 익스트로피언과 사이퍼펑크 메일링 리스트와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겹쳤고, 2008년 금융 위기가 암호화폐를 필요하게 만들기 훨씬 전부터 비트코인과 같은 기술의 개념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비트코인 디자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b-money' 제안을 한 컴퓨터 엔지니어 웨이 다이는 두 커뮤니티 모두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디지털 미래는 정책 서클에서 논의되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버너 빈지의 1993년 기술적 특이점에 대한 에세이와 닐 스티븐슨의 크립토노미콘 (1999) — 암호학자들이 디지털 화폐를 만드는 소설 — 을 실제 코드와 함께 논의하는 포럼에서 상상되고 있던 것이죠.
"미래는 민주적인 논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선택적이고 종종 반동적인 환상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저는 이것을 '반동적 미래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는 반민주적 정치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공상과학적 미학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의 크롬 도금된 미학을 사용하여 이상화되고 잔인했던 과거, 즉 급진적인 개인주의, 비규제 시장, 민주적 통치 거부를 특징으로 하는 19세기 개척 자본주의로 돌아가되, 21세기 드론과 알고리즘으로 무장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틸의 2009년 에세이는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 후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우리 세계의 운명은 자본주의를 위한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자유의 기계를 만들거나 전파하는 단 한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리고 집단적 노력이 아니라 단 한 사람. 이것은 파운데이션 서사, 해리 셀던 신화, 대중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고독한 선구자 이야기입니다. 아시모프가 그 신화를 옹호하기 위해 구축한 민주적 제도들은 사라진 채로 말이죠.
공상과학은 이러한 반민주적 비전을 위한 미학적 위장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참정권을 되돌리는 것을 빅토리아 시대의 퇴행이 아니라 대담한 미래주의처럼 들리게 합니다. 그것은 민주적 책임 거부를 탈출 속도, 개척 확장, 문명 생존으로 변모시킵니다. 미래는 민주적인 논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선택적이고 종종 반동적인 환상을 통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 모델 하에서 국가-민족은 단순히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비워지고, 기업 도시 국가와 사적인 디지털 관할권으로 대체됩니다. 스노우 크래시의 프랜차이즈 국가가 현실이 되는 것이죠.
8. 또 다른 미래, 다른 이야기들
핵심 질문은 공상과학이 현실을 형성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니까요. 질문은 누구의 버전이 승리할 것인가입니다.
실리콘 밸리의 힘은 좁고 반동적인 환상을 피할 수 없는 진보로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미래도 가능하고, 다른 공상과학 소설들도 존재합니다.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 (1974)은 착취가 아닌 상호 부조에 기반한 아나키스트 달 식민지를 상상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비유 시리즈 (1993-98)는 화성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적응과 보살핌을 통해 붕괴에서 살아남는 공동체를 묘사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화성 삼부작 (1992-96)은 행성 정착을 억만장자의 모험이 아닌 집단적 민주 프로젝트로 보여줍니다. 이것들은 순진하거나 유토피아적인 텍스트가 아닙니다. 새롭고 어려운 것을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해 까다롭고 솔직한 작품들이죠. 그들은 고독한 선구자의 위안을 거부하고, 미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함으로써 만들어진다고 거듭 주장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미래가 중립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디스토피아를 사업 계획으로 취급하는 이사회로부터 우리가 되찾을 권리가 있는 선택 말입니다. 틸, 머스크, 저커버그, 안드레센이 공상과학에서 청사진을 찾을 때, 그들은 유일하게 가능한 미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미래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상과학은 항상 정치적이었습니다. 깁슨의 뉴로맨서는 기업 권력에 대한 경고였지, 투자 유치 설명서가 아니었습니다.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시는 풍자였지,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은 개인 천재성의 한계와 민주적 제도의 필요성을 탐구했습니다. 스타트렉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상상했지, 더 좋은 우주선으로 자본주의를 개조하는 것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미래가 이야기로 만들어진다면, 우리의 과제는 그 이야기들이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합당한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공상과학의 선택적 배치를 정치적 전술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사화된 드론과 사유화된 도시 헌장을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특정하고 좁은 이야기의 결정체로 보는 것이죠. 이는 문학적 과거의 선별된 환상이 아니라 현재의 다원적인 요구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미래가 건설되고 있는가? 누가 혜택을 받는가? 누가 비용을 지불하는가? 약탈 과정에서 무엇이 버려졌는가?
미래는 크롬 도금된 외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복잡하고, 더 혼란스러우며, 항상 그 안에 살고 있는 다양하고 지역적인 삶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 속 배경 인물이 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결론
실리콘 밸리의 리더들은 공상과학 소설의 기술적, 미학적 요소만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반민주적, 자본주의적 비전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원작의 핵심적인 사회적, 윤리적 경고를 무시하고, 기술 발전을 통해 불평등과 사회적 퇴행을 가속화하는 '반동적 미래주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상과학이 제시하는 다양한 미래 비전을 이해하고, 현재의 복잡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